작업실 안 밖
문규화 드로잉전
벽면을 가득 채운 베이킹 드로잉에는 빵을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다. 빵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그림인가 싶어 차례차례 보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같은 과정이 여러 번 그려져 있기도 하고, 어떤 과정은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정작 중요한 다른 재료나 계량값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 이는,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는 일련의 장면들을 툭툭 내뱉은 듯하다. 드로잉은 붓이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마치 손끝으로 그려진 것 같은데, 빵을 만들던 손끝은 사실 그림을 그리는 손끝이었다는 생각이 스친다.
문규화는 그림을 그리는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베이킹과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분과 상태가 다른 재료를 넣어야 탄성 있는 반죽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작가는 그림에만 몰두하던 삶에 질감이 다른 여러 활동을 섞어 견고한 하루를 만들고는 한다. 일생을 캔버스와 마주해야 하는 것이 작가 된 자의 숙명이라지만, 네모난 화면은 수심을 알 수 없는 우물과 같아서 그곳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을 지상에 머물게끔 만드는 방법, 자신을 다루는 방법. 주묵(朱墨)으로 그려진 베이킹 드로잉은 그것의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처럼 작가의 일상에 베이킹이 얼마나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보여준다. 잠이 들기 전 반죽을 빚어놓고, 자는 동안 숙성된 반죽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오븐에 구워낸다. 하루의 끝과 시작을 베이킹에 내어준 그는 사이사이에 또 다른 일상적인 활동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배치한다. 집이라고도, 작업실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공간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오롯이 자기 손으로 꾸려간다. 일상은 그렇게 드로잉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베이킹 드로잉의 맞은편, 작가가 작업실 밖에서 마주한 여느 나날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홍수가 나 일대가 물로 가득했던 풍경, 가족의 장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 엉뚱하게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속 무서웠던 눈빛, 그냥 상상하며 그린 무대, 파테크가 유행이던 시기 길거리에 보이던 파, 러닝하는 사람들, 창문을 열면 보이던 가지치기 당한 나무들, 여행에서 보았던 수영장의 수챗구멍. 시시하고도 평범한 이야기를 가진 그림이지만 오히려 작가가 품었던 슬픔과 행복, 호기심, 불안, 여유, 유머가 그대로 드러난다. 거침없으면서도 간결하게 내디딘 선은 무심하게 그려진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각각의 리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리듬은 선명한 자국이 되어 그림을 그렸던 그 당시 작가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 경험한 감각을 그린 그림은 사진보다도 더 선명한 사실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업실, 그림을 그리는 작업 공간이자 평범한 삶을 살아내는 생활의 터. 문규화는 지난 몇 년간 청운동에 위치한 2층짜리 작은 목조 주택을 작업실로 사용해왔다.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수도관은 말썽이었고, 천장에서는 물이 샜으며, 방음도 엉터리에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는 본 적도 없는 종류의 벌레들을 보곤 했다. 하자에 골머리를 앓던 작가는 청운동 작업실을 벗어난 지금, 이제야 그곳을 그려낸다. 너울거리던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반죽을 하룻밤 동안 숙성시켜야 그다음 날 구워낼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켜켜이 자리 잡은 청운동에서의 시간을 간직해 두었고, 다시 끄집어내 그림에 옮겼다.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던 나무와 풀들, 한쪽에 놓인 침대, 빼곡하던 캔버스, 거실에 놓인 식탁,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그곳에 내리쬐던 햇볕까지. 그리곤 벽돌과 유리창을 세워 청운동 작업실을 완성했다. 하나씩 비우고, 또 하나씩 채우며 적당한 모양새로 맞춰지던 일상은 이제 온전한 제 자리를 찾아 그림이 되었다. 작업실의 안과 밖을 오가며 매일을 빚어내던 그가 습관처럼 남긴 드로잉과 우리는 마주한다. 어쩌면 내가 간직해온 하루하루의 조각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 앞에서 서본다.
글.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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