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초록
글 서민정
1. 축축한 초록을 붙잡기 위한 여정
최근 3년 작가는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울을, 그리고 한국을 떠나 있었다. 페인팅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공간’, ‘장소’, 일종의 작업실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나갔어요” 라고 말한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가는 산을 그리기 위해 산이 많은 지역으로 나갔다. 문규화 작가에게, 그리고 그녀의 작업에, 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흥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작가가 산을 그리기 위해 여기 저기를 돌아 다닌 여정은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아이슬란드 링로드를 따라 돌며 멀리 보이는 산의 형태와 색감, 만질 수는 없고 상상 할 수는 있는 질감과 온도를 담아 내려 했던 작가의 과감한 외출은 작업실 한 켠을 차지 하고 있던 파 한 뿌리를 바라보고 감각을 집중했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자연과 단절 된 도심의 건물 구조 안에 혼자 살던 작가는 풍경이 없고 식물을 마주할 일이 없는 공간에서 그래도 초록의 자연적 성격을 접하고 싶었다. 식재료로 사들인 초록의 채소를 바라보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집안에 들어 오게 되었던 식물을 기르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생장하기도하고 시들어 가기도 하는 모습, 즉 물성이 변해가는 모습에서 두려움과 거부감 같은 감정이 동반되었다. 파는 마트에서 사 올 때와 달리 점차 색이 빠졌고 크기는 작아졌으며 말라 비틀어졌고 단단함은 사라졌다. 냉장실에서 보낸 시간의 끝에는 짓물러 진액이 흐르고 물렁한 상태의 어떤 것이 남았다. 그것 역시 파였다. 선물 받은 꽃다발도 마찬가지였다. 시들고 말라가는 꽃다발을 가까스로 유지해 주던 물은 썩었고 미끈하고 물컹하게 냄새를 풍겼다. 작가는 식물을 살아 있는 동안 가장 ‘그것다운’ 모습으로서 그 식물 자체를 인지하고 있던 자신의 생각에 파장을 불러 일으킨 사소한 경험을 거쳐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했다.
2. 드로잉
“식물을 무서워하는 부분이 있어요”
작가는 식물의 변화, 특히 물컹하게 썩어가는 모습에서 느낀 감각에 불편함을 느낀다. 불편한 감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롭게 얻은 경험이 되어 자연의 유기적인 현상을 통해 생명의 경계를 시각화 하는 여정을 걷게 되었다. 작가는 파와 작은 화분을 들여다보며 지금 바라보는 파의 형태와 질감들을 어떻게 하면 고정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을 고정시키고 변화를 정지시키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찰흙에 파를 꽂는 일이었다. 찰흙에 꽂힌 파는 그 상태로 하나의 조각, 기념비가 된다. 고정된 것이 없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물의 한 순간을 고정시켜 보겠다는 어찌 보면 터무니없고 한편으로는 귀여운 이 의지는 상상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실험이며 어떤 면에서 주술적, 기복적인 면마저 느껴져 조각이나 기념비가 행하는 의미와도 교차된다. 찰흙에 꽂힌 파는 여전히 변하고 찰흙마저도 변하겠지만 이미 작가에게 그 순간은 변하지 않는 것이며 고정되고 정지된 상태로 여겨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박제’된 파를 그리며 다시 한 번 그것을 고정시키고 기록한다. 작가는 이런 일련의 방식을 단지 드로잉이며, 연습의 과정이라고 했다.
‘생각과 상상을 남기는 드로잉적인 작업’은 근작의 주요 소재가 된 ‘산’을 담는 방식의 기초가 되며 지속하고 있는 연습이자 그가 집중하는 감각의 시작이다. 시각은 물론, 그가 체험하며 느낀 식물과 자연의 유기적 현상에서 느낀 두려움과 거부감은 촉각적으로도 강하게 남겨져 그 ‘축축한’ 것들을 평면적, 입체적 형상으로 표현 해 내고 있다.
3. 식물과 산
문규화는 방안의 작은 식물과 산이 다른 대상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즉 작가는 이 둘을 풍경(landscape)으로 대함으로써 식물들을 실내에서 직접 보고 그것을 고정하여 그려내는 방식과 동일하게 산의 경우도 직접 대면하기 위해 나갔고 여러 장소를 방문했다. 바깥에 존재하는 산을 그릴 때는 촬영을 겸한 사생을 기본으로 한다. 오랜 시간 산을 바라 볼 수 없는 제한적인 환경이기에 빠른 시간 안에 드로잉을 하고 그 기록들을 중심으로 작업실에 가져와 다시 그것을 구현해 낸다.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작가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에서는 동일하나 실내 작업과 실외 작업에서의 감흥, 그것이 작가가 인위적으로 붙들어 놓은 것이냐(실내), 아니냐에 따라 작업의 성질은 매우 달라지게 된다. 그 차이는 각각의 현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 현장 안에 있는 작가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주어진 재료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작가가 화면에 이미지를 표현해 내기 위한 공통의 관심은 형태와 색감, 즉흥적으로 느껴졌던 자연물들의 물성이다. 자연물이 가지는 ‘색감’, 변화하는 식물을 경험하면서 느낀 ‘물성’의 감각, 그것이 작업의 시작단계에서 주지했던 관심이었다.
문규화 작가의 작품 속 대상들의 형태는 굵직굵직하고 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무언가를 뚝뚝 떨어뜨리고 썰어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전에 대상을 세밀하게 찾아보려 했던 ‘신경쓰기’가 현장작업을 통해 무관해지고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장 작업은 그 순간과 다음 순간의 흐름, 정해져 있는 시간을 최대치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때의 현장에서 만들어 지고 있는 작업들이 자신의 것이라 느꼈다고 고백한다.
4. 축축한 초록
문규화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식물과 자연의 첫인상은 강직함이다. 이는 형태와 색감, 부드럽게 연이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친 힘이 가해진 붓질의 흔적, 무겁고 퍽퍽하게 쌓인 물감의 물성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는 반복해서 축축하고 눅눅한 느낌, 물과 바람과 햇볕에 의해 변해가는 생명, 끈적함과 물컹함, 습하게 고여있는 은밀한 장소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는 작가가 식물과 산을 풍경으로, 특히 원경으로 보면서 큰 덩어리의 대상들로 툭툭 떠내지만 실은 그것들의 큰 움직임 속 작은 진동, 거친 기운 속 세밀한 기운, 생동하는 초록 속 썩는 일부, 그리고 죽음이 포함 된 시간을 아주 내밀하게 포함시키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다시 돌아가서 결국 작가에게 파 한 줄기와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산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으로서 유기적인 대상으로서 그것은 자연을 상징하는 색 초록을 지니고 있으나 그 안에 담긴 이면의 축축함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며 그것이 작가가 자연을 대하고 바라보는 작가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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